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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논산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의 유래

논산 강경성결교회는 1918년 10월 18일 창립되었다. 이후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초대감독이며 경성신학교의 초대교장이었던 영국인 존 토마스 목사가 강경성결교회의 건축부지 매입을 위해 1919년 3월 20일에 방문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교회 근처 옥녀봉에서 만세운동이 한창인 것을 목격하고 고난 받는 한국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내려와 강경교회 예배당터를 발품으로 측량하고 있었다. 이때 웃통을 벗은 일본인들이 달려들어 무차별 구타하여 골절상을 입게되고 강제투옥

 

을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과 일본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어 영국이 승리하게 되었고 일본은 존 토마스 목사에게 당시 돈 5만불의 보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떠난 존 토마스 목사는 보상금의 일부를 헌금하여 강경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고 1923년에 봉헌하였다.

 

일본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기독교를 박해할 목적으로 문화정책의 일환인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강

경교회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최초 신사참배거부운동(1924년 10월 11일)과 일본의 역사강요에 대한 거부운동인 상애어린이단사건, 이헌영 목사의 재림신앙고수로 인한 투옥 및 교단폐쇄 등 일본 제국주의자들의만행에 맞서 의연히 신앙으

 

로 대항하였다. 이후 6.25 동란중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신앙을 사수하며 주일예배가 한번도 끊이지 않았고 이후 여러 사건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며 나갔던 강경성결교회였다. 

 

(구)논산 강경성결교회는 위와 같은 역사적 의미 뿐만 아니라 건축물로써도 의미가 있다. 한옥의 모양을 한 한옥교회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건축양식으로 매우 독특한 건축구조와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특히 목재의 치목수법과 가구기법은 전통적 기법에서 근대시기 건축기술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룔이다. 한옥교회의 현존

 

사례가 극히 드문 현신을 감안하면 이 건물의 희소가치가 매우 높다. 초기 한옥교회는 건물 전면에 별도의 문을 두어 남녀신자를 구분하였으며 교회의 기능에 충실한 평면의 변화와 상부 가구구조의 구성기법 등은 초기 기독교 한옥교회의 근대화에 따른 건축적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구)논산 강경성결교회는 당시의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참고] (구)논산 강경성결교회 안내판

 

국내에 얼마 남아있지 않은 한옥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안에서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엿보기 위해 한걸음 더 들어가봤다.

 

(구)논산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의 모습

(구)논산 강경성결교회로 가는길

(구)논산 강경성결교회의 모습을 보며 선조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예배를 드렸던 선조들. 그들의 눈물어린 기도가 스며들어 있는 예배당을 보며 다시 한번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논산에 어려있는 선조들의 헌신과 도전에 다시 마음에 새겨보며 (구)논산 강경성결교회는 여기서 맺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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